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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임은정 지검장은 왜 ‘열사’ 아닌 ‘검사 이준’을 ‘존경하는 선배’라 꼽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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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민종 작성일25-07-18 05:25 조회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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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준 검사의 후배입니다.” 최근 임은정 검사가 서울동부지검장으로 발탁되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여러 관련 기사가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그 가운데 2022년 6월7일 임 검사가 SNS(페이스북)에 게재한 글과 사진이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임검사가 검찰청 역사관에 마련된 ‘검사 이준의 상(흉상)’ 옆에서 찍은 사진이 첫번째요, 임검사가 “이준 검사의 후배로서 저도 이준 검사의 흉내를 낼 것” 이라고 다짐한 것이 두번째였다.
비단 임은정 검사만 그런 것은 아니다. 대검찰청은 2011년 4월 ‘대한제국 검사 이준 열사 학술 심포지엄’까지 열었다. 대검찰청이 해마다 전국 고교생을 대상으로 진행해온 행사 명칭도 ‘이준 Justice Camp’다. 지금도 대검찰청 홈페이지에는 ‘초대 검사 이준’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서울북부지검의 대회의실 명칭도 ‘이준 홀’이다.
생소하다. 이준 열사가 어떤 분인가. 고종의 특명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1907)에 특사로 파견되어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알리려 했던 분이 아닌가. 그러나 일제의 노골적인 방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너무도 애통한 나머지 순국한(1907년 7월14일)이 아닌가. 그런 이준 열사가 ‘대한민국의 1호 검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검사 이준’은 어떤 인물일까.
■능참봉→대한제국 1호검사
이준은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의 형인 완풍군 이원계(1330~1388)의 후손이다. 1859년 함경도 북청 중산리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성재(性在)였다가 선재(璿在)로 개명했고, 1900년대초부터 준(儁)이라 했다. 1887년 29세의 나이로 북청 향시의 초시에 합격했다. 36살 때인 1894년 8월 함흥의 순릉(경순왕후릉·태조의 할머니묘)을 지키는 능참봉(종9품)이 됐다.
그러다 7개월만인 1895년 3월10일 ‘법관양성소 입학을 위해’ 상경한다. 법관양성소는 1895년 3월25일 평리원(법원) 안에 설치된 대한제국 법부 산하의 국립 교육기관이었다.
이준의 법관양성소 졸업성적은 47명 가운데 14등이었다. 하지만 수석을 차지한 함태영(1872~1964)보다 먼저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용되었다.(1896년 2월3일)
그러니 최초의 검사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불과 1개월 2일 만에 검사직에서 물러난다. 당시의 공문서는 “이준은 ‘행동거지가 어지럽고(擧措)가 소홀(駭忽)’해서 면관 됐다”고 밝혔다. 훗날 ‘아무런 사유없이 10여일간 출근하지 않았다(無故히 十餘個日을 不進)’는 게 직위해제의 이유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관파천(1896년 2월11일)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송상도(1871~1947)의 <기려수필>은 “이준이 아관파천 당시 법부대신 장박과 함께 궁궐을 넘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4년 뒤 귀국했다”고 전했다.
■특검(?) 이준
이준의 국내 활동은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1904년 3월 드러난다.
이준은 이후 적십자회와 공진회의 활동으로 두 차례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다. 그러나 이준은 두차례 모두 “잘못된 재판”이라고 강력 반발하며 법정투쟁을 불사했다.(이 내용은 블로그 참조)
그랬던 이준이 황명에 따라 다시 평리원 검사로 임명된 것은 1906년 6월18일이었다.
10년 3개월 만의 복직이었다.
그는 특별법원(황족의 범죄를 심리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 법정) 검사직까지 겸임한다. 이때의 특별법원은 황족인 이재규(1877~?) 사건을 재판하기 위해 설치됐다. 이재규 등이 황족의 지위를 이용, 경기 가평 논밭의 문권과 증권을 위조하여 자기 소유로 만든 사건이었다.
이준 검사가 참여한 특별법원은 이재규에게 징역 10년형을 판결(고종의 칙명으로 유배 10년으로 감형)했다. 요즘의 특검, 혹은 공수처 검사일까.
■법부 형사국장 기소
이준 검사가 ‘전국구 스타 검사’로 떠오른 사건은 따로 있었다. 이준이 법부의 간부들과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이로써 이준은 검사 신분으로 기소되고 재판을 받아 결국 파면되고 만다. 그 사건의 진상 속으로 들어가본다.
1906년 12월이었다. 황태자(순종)의 가례(혼인·1907년 1월24일)에 맞춰 대사면령이 내렸다. 당시 사면명단을 만드는게 검사의 직권이었다. 이준 검사는 ‘은사안(사면명단)을 만들어 상부(법부)에 올렸다.
은사안에는 장두형 등 곡산 소요 사건 3명과, 김일제·기산도 등 모살 미수사건 10명, 미결수 중 소요사건 김성기와 늑표(협박으로 억지로 받은 증서) 사건 민용호 등 소요 사건 관련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 ‘김일제·기산도 등 10명’이 중요했다. 을사오적 중 하나인 군부대신 이근택(1865~1919)을 처단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우국지사들이었다.
그런데 법부의 형사국장 김낙헌(1874~1919)이 명단을 멋대로 바꿔 상부에 올렸다.
앞서 거론된 인물들을 빼고 시흥 민요(소요) 사건의 성유경과, 반역 무고죄인 김유인·장지원·김준식 등을 포함시킨 것이다.
이준은 이를 두고 “통상의 사면령에서도 포함될 경미한 죄인들은 모조리 빼고 중죄인을 사면명단에 넣었다”고 분개했다.
이준은 가만있지 않았다. 법부에 형사국장 김낙헌을 기소했다. 이준은 ‘검사로서의 본직이 국가 생명 재산에 대표된 자’로서 기소권이 있다고 밝히면서 이번 은사안이 바뀐 것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형사국장 김낙헌은…김일제 등 10여 인 등을 은사안에서 함부로 삭제…‘사면령 등에 죄수를 방면 혹은 감등할 때 조종(멋대로 다룸)하는 자는 파면 또는 처벌해야 한다’는 <형법대전> ‘331조’에 따라 죄를 물어야 한다….”(<황성신문> 2월12일 ‘법관기소’)
■죄수에게 나눠준 떡국 한그릇
일개 검사가 상부(법부) 관리를 기소했다는 놀라운 소식은 곧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검사 이준의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풍모’까지 앞다퉈 보도했다.
“평리원 검사 이준이 음력 섣달 그믐에 평리원 감옥에 가서 죄수들을 위로…이준 검사가 ‘국밥(떡국?) 한그릇(湯飯一器式)’씩 수감자들에게 나눠주니, 일반 죄수들의 칭송이 자자….”(황성신문 2월18일)
“이준 검사는 매일 출근 때마다 먼저 감옥을 찾아 죄수들을 위로…병자들을 치료하도록 조치…재판은 빨리 진행하여 오래 수감되지 않도록 하니, ‘이준 검사의 인자함과 공평한 법적용을 미루어 짐작…’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2월20일)
■전국구 스타로
이준은 일약 ‘전국구 스타 검사’로 떠올랐다. 이준을 지지하는 보도와 논설이 봇물을 이뤘다.
예컨대 황성신문은 “이준 검사가 한국 법률계에 한가닥 빛을 안겨주었다”면서 이준 검사의 고소를 평가했다.
“…권문세가나 외척, 지인들이 나서면 법관이 죄의 경중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뇌물을 주지 않고, 힘이 없는 자에게 죄를 묻고…매질 한 번에 양민이 도적이 되고…이준 검사가 강경한 고소로 법관의 악습을 탄핵하니….”(2월18일자)
만세보(2월19일자)도 “법부 형사국장 김낙헌을 고소한 이준 검사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낸다”고 응원했다.
“법률은 저울 같은데…저울을 사용하는 자가 가벼움을 무겁게, 무거움을 가볍게 하여 법을 농단…천하의 공정한 눈을 가려서 민심을 격동시켜 국가의 재난을 야기…공명법률을 일개 법관(김낙헌)의 수중에서 망하게 하니….”
■무슨 법으로 나를…
그러나 법부 문서과장 이종협은 이 기소장을 각하하면서 “이준의 위법사실을 논과함이 옳다”고 평리원에 통첩했다.(대한매일신보 2월20일)
이에 평리원은 이준 검사를 체포했다. 이때 이준을 취조한 이는 평리원 수반검사 이건호였다.
이때 이준 검사는 이건호 검사에게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고 거세게 반발했다.
“법부대신의 훈지(訓旨)도 없고, 또 문서과장이 무슨 권한으로 검사의 기소장을 각하시키느냐. 법리에 어긋나므로 답변을 거부하겠다.”(이준)
“법관은 심문권이 있다. 당신은 피고인이니 무엇이든 답을 하라.”(이건호 검사)
“법률에 무지몽매한 이가 어찌 법관이라 하는가. 법 공부 다시 한 다음에야 법관이라 칭하는게 좋겠다.”(이준)
이준 검사의 반발이 거세지자 재판장 이윤용은 “이준을 감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그러자 이준 검사가 “무슨 죄로 나를 하옥시키는 거냐”고 소리쳤다.
“어떤 법에 근거해서 날 하옥시키는지 말해주라…타당한 법률을 먼저 내보이고 하옥시키라.”(이준)
그러자 이윤용 재판장과 이건호 검사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재판정을 떠났다. 이준 검사는 부득이 평리원 간수간(看守間)에서 하룻밤 묵고 이튿날(20일) 오후 석방되었다.(황성신문 2월21일 ‘잡보’)
■사법사상 쾌거
이준이 체포된 사이 여론은 들끓었다. 대한매일신보는 문서과장 이종협과 수반검사 이건호를 싸잡아 비판했다.
“문서를 접수하는 일이 업무인 문서과장(이종혁)이 ‘유죄’를 판단하는 것은 법이 허용한 바가 아니고, 이건호 검사 역시 상부의 훈령도 없는 데 무죄인 동료를 독단적으로 체포했다. 이렇게 법을 멸시한 것은 듣도보도 못한 일이고, 있어서도 안될 일…”(2월21일)
이준은 예서 넘어가지 않았다. 형사국장 김낙헌 외에 문서과장 이종협, 평리원 수반검사 이건호 등도 추가 고소했다.
“법부 문서과장 이종협의 직권은 단지 소송을 접수하는 것에 그친다. 검사의 직권이 없다. 그럼에도 이종협은 ‘위법사실을 논죄하라’고 통첩했다. 이는 월권이다. 검사 이건호는 이종협의 통첩을 받고 본부(법부)에 보고하지도 않고 함부로 동료를 체포했다.”(만세보 2월23일)
시중에서는 이준의 기소를 사법사상 쾌거로 받아들였다. 사법 관리들은 ‘왕법멸법(枉法蔑法·법을 왜곡하고 멸시)의 법관’으로 비난받았다.(황성신문 2월18일) 대한자강회는 국민연설대(독립관)에서 이준 검사를 옹호하고 법부 관리들을 성토하는 연합연설회를 열었다.(2월25일)
“공판에서 재판장 이윤용(이완용의 형·1854~1939)이 이준 검사를 겁박하려다가 방청객들이 술렁거리자 위협을 느낀 나머지 후문으로 피신했다. ‘피하는 것이 상책’(走爲上策)으로 여긴 듯 싶다”는 가십 기사(대한매일신보 2월28일)가 실렸다.
■재판에 일본군 및 헌병 동원
1907년 3월초 언론에 기막힌 기사가 잇달아 실린다.
“재판정 앞에 일본 순사와 일본 헌병 등을 지키게 하여 인민의 출입을 엄금….”(만세보 1907년 3월3일)
“일본 헌병 및 순사를 다수 배치하고…재판장 이윤용씨는 순사 2명의 호위를 받고 평리원으로 복귀.”(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3일)
“공판 때 이준을 외국 순사가 포박하고 내외국 군·경을 다수 배치…계엄을 엄밀히 하고….”(황성신문 1907년 3월4일)
이준 검사의 재판에 일본군 및 헌병을 동원했다는 얘기다. 일본측 사료에는 더욱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1907년 3월1일 기우치(木內) 통감부 경무총장이 당시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1841~1909)에게 보낸 보고서다.
“검사 이준이…사면에서 한일협약(을사늑약)에 반대한 범죄인의 사면을 병행할 것을 주장…법부대신에게 받아 들여지지 않은 것에 격분…이준을 체포하여 공개 재판하던 중 청중 수천명이 법정에서 소란…. 내일(2일) 재판이 속개…폭동을 우려…(한국의) 법부대신이 통감 대리에게 은밀한 교섭…통감부가 헌병을 파견하여 경계토록 할 계획….”
■‘한국 법률 애도의 날’
과연 만세보와 대한매일신보는 3월2일 열린 재판에 참석한 방청객과 동원된 군·경 인원수를 전했다.
“대한자강회 5명, 국민교육회원 2명, 일진회원 3명 등 10명은 방청. 일본 헌병 장교 1명, 일본 헌병 30명, 일본 경부 1명, 일본 순사 8명, 조선 순검 5명, 헌병 6명 등 110인은 경비인.”(3월5일자)
방청객은 10명으로 대폭 줄이고, 경비인원만 110명 배치시킨 것이다. 평리원은 이날 재판에서 이준에게 태 100대형의 판결을 내렸다.
이날 판결을 맡은 박만서 판사(1879~1924)는 “하관이 상관을 고소한 월권이었고…사면 대상자를 취사선택하는 것은 상관의 일인데, 그것을 검사가 논박했다”고 밝혔다.
이준은 “피고가 검사의 법리에 복종한 후에야 법관이 판결 처분의 권한이 생기는 것”이라면서 “나는 결코 인정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준은 “공판을 위해 내외국 순검 헌병을 도열해놓고 이준을 위협했다”면서 “한사람의 재판을 위해 우리나라 법관의 위력도 족한데, 어찌하여 외국 병력까지 보탰느냐. 정말 한심한 일”이라고 개탄했다. 그럼에도 이준은 일본 경찰에 의해 구금했다.(만세보 3월8일)
대한매일신보는 ‘한국 법률의 명운을 애도한다(弔韓國法律之命運)’는 제목의 논설에서 “1907년 3월 2일은 한국의 법관들이 일본군 병력의 위력을 구걸하면서 황상의 은택을 막고 인민의 공의를 위압하여 법률을 박멸한 날”(3월5일자)이라고 비판했다.
신문은 “그 악랄한 음모를 저지른 자는 법부대신 이하영, 재판장 이윤용, 법부 형사국장 김낙헌·문서과장 이종협, 평리원 검사 이건호 등”이라 지적했다.
■무법지부(법부), 불평지원(평리원)
아무튼 이 판결에 따라 이준은 면직될 위기에 처했다. 법적으로 태 100대 이상이면 관리직에서 면직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준의 형을 태 70대로 감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이준은 이에 속(贖·일종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이준은 3월13일부터 다시 평리원 검사로 출근했다.
그냥 물러날 이준이 아니었다. 16일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1858~1916)에게 청원서를 보내 “법부대신(이하영·1858~1919)과 평리원 재판장 이하 관리 및 법관을 모두 면직하고 벌을 주라”고 촉구했다.
이준은 이들의 죄상을 열거한 뒤 “법부는 무법지부(無法之部)이고, 평리원은 불평지원(不平之院)이라 일컫는다”고 규정했다.
법부를 ‘무법이 판치는 부처’로, 평리원을 ‘불평등한 법원’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에 앙심을 품은 법부대신 이하영이 통감부로 달려갔다. 그는 당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를 만나 ‘이준 사건의 전말과 고종의 감형’ 소식을 전하면서 통감부의 개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하세가와는 “군주의 명을 어찌 신하된 자가 거스를 수 있냐”고 난색을 표했다.
대한매일신보는 “하세가와의 박대에 이하영은 얼굴이 벌게진채 돌아왔다”고 전했다.(3월14일) 그러나 이하영은 집요했다.
“법관의 체모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이준의 면직을 요청하는 상주문을 고종에게 올렸다. 이에 황태자(순종)가 “이준은 무죄”라며 이하영이 올린 상주문을 보류시켰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준의 면직이 정식 공고되었다. 고종은 뒤늦게 ‘누구의 짓인지 철저히 조사하라’고 진노했다.
그러나 이미 공고된 ‘이준의 면직’ 결정을 돌이킬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황제 최측근인 비서승 윤헌섭이 이하영의 앞잡이가 되어 개입했다는 설도 있다.(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17~19일) 결국 이준은 3월16일자로 면직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정부 회의석상에서 비판발언이 나오자 이하영이 노발대발하면서 ‘이준 사건을 사석에서는 말할 수 있지만 정부회의석상에서는 말하지 마라’고 입단속 시켰다”고 비판했다.(3월24일)
■대쪽 검사 이준
이 사건으로 이준은 대쪽 검사로 각인됐다. 만세보는 “이준은 강직(항직·亢直)한 명예가 본디 명망이 높은 인사”(3월20일)라고 평가했다.
고종은 이준을 결코 잊지 않았다. 재판과정에서 보여준 해박한 법률 해석을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 같다.
1907년 4월10일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6월15~10월18일)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한 고종은 극비리에 특사 파견을 결정하고 인선에 들어갔다.
을사늑약 체결 전말을 잘 알고 있던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1870~1917)을 정사로 삼았다. 또 이미 법관으로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법상으로 따질 수 있는 이준을 부사로 결정했다. 이와함께 러시아·불어·영어 등에 능통한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역시 부사로 참여시켰다.
어떤가. 그동안 이준 열사는 헤이그 특사로서 순국한 애국지사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단 9개월간의 평리원 검사 재직 기간에 일어난 일화와 사건은 ‘헤이그 특사 이준의 삶’까지 규정하고 있다.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법치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법률가의 투철한 정의감을 새삼 반추해본다. 검사 이준의 법정 진술이 귓전을 때린다.
“임금의 잘못은 신하가, 아버지의 허물은 자식이 간하거늘 상관의 불공정한 법 집행을 어찌 하관(후배)이 꾸짖지 않을 것인가.”(<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5일 ‘재판광경’) 이 구절은 지금도 대검찰청 홈페이지 ‘이준 역사관’에 걸려있다.
“법부는 무법지부(無法之部)이고, 평리원은 불평지원(不平之院)이라 일컫는다”고 규정한 이준 열사의 비판을 떠올린다. 정말 뼈저린 비판이 아닌가. 임은정 검사가 왜 검사 이준을 사표로 삼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검찰 한사람 한사람이 검사 이준의 삶을 한번쯤 돌아봤으면 좋겠다.(이 기사를 위해 문준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전해주었습니다.)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문준영, ‘한말의 1세대 법률가 이준, 지사적 삶과 검사로서의 활동’, <검찰> 117호, 대검찰청, 2006
문준영, ‘1895년 재판소구성법의 출현과 일본의 역할’, <법사학연구> 39호, 민속원, 2009
최기영, ‘한말 이준의 정치·계몽활동과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9권 29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박석정, ‘대한제국기 검사제도에 관한 연구’, <한국교정학회소식> 28권 2호, 한국교정학회, 2018
김효전, ‘이준과 헌정연구회 -당시의 신문보도를 중심으로’, <인권과정의> , 대한변호사협회, 2003
류자후, <이준선생전>, 동방문화사, 1947
지난 20년간 한국의 고용률은 꾸준히 상승했다. 통계상으로는 긍정적인 신호다. 그러나 현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르다. “사람을 못 구하겠다” “일할 만한 곳이 없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일자리 ‘양’은 늘었지만 ‘질’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다.
단순히 일자리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일할 수 있고, 일하고 싶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특히 청년층은 지역 일자리를 기피하고, 기업은 청년이 만족할 만한 처우를 제시하지 못하는 구조적 미스매칭에 시달리고 있다. 일자리 정책의 본질적 재구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숫자만 개선한다고 해서 현장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수치가 아니라 사람의 삶이 정책의 기준이 돼야 한다.
광산구는 이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 일자리 특구’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취업 지원 정책이 아니라 노동자와 기업, 행정과 정부가 함께 질문하고 해법을 찾는 ‘사회적 대화의 공간’이다. 대기업이나 정부 기관 유치에 의존하는 기존 일자리 정책 대신 현재 일자리의 질을 개선해 시민이 원하는 일자리를 만들어가자는 취지다.
광산구는 정책 설계에 앞서 시민과 기업, 전문가들과 함께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1436개 질문을 모아 ‘녹서’를 제작했다. 유럽 ‘그린 페이퍼’ 개념을 따 온 녹서는 정책 수립 전 이해관계자들의 의견과 질문을 모은 보고서다. 정책의 결과물이 아니라 시작점이며, 수직적 지시가 아닌 수평적 숙의에 기반한 실험을 위한 토대다.
광산구 녹서 실험의 핵심 중 하나는 ‘사회임금’이다. 사회임금은 일정 기준을 충족한 노동자에게 주거비, 보육비, 교육비 등 필수비용을 지원한다. 노동자에게는 일자리 선택의 안정성을 주고, 기업에는 인재 유인의 수단이 된다.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사회가 노동의 가치를 공동으로 책임지는 구조다. 안정된 삶의 기반 위에서 일의 의미를 회복하고, 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공동체적 계약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책이 일방적 지원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설계된다는 점이다. 광산구는 향후 녹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정책을 펼 예정이다. 이 작은 지역의 실험이 대한민국 전체의 변화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지방정부가 실험하고, 중앙정부가 학습하는’ 새로운 협치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속 가능한 사회는 정부 혼자 만들 수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은 중앙집중형 구조에서는 더 어렵다. 지방이 자유롭게 설계하고 실험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실패조차도 의미 있는 자산으로 축적될 수 있어야 한다.
일자리는 단순한 경제지표를 넘어, 사회통합의 열쇠이자 신뢰의 기반이다. 노동시장 양극화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상력과 실천이 필요하다. 이제는 우리 모두에게 물어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어떤 일자리를 꿈꾸는가. 그리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나갈 것인가.
대전의 한 노동자가 연락이 끊긴 지 하루 만에 공장 기계 안에서 숨진 채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17일 경찰 등에 따르면 전날 오후 11시56분쯤 30대 노동자 A씨의 부인이 “남편이 집에 귀가하지 않았다”고 112에 신고했다.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통해 A씨가 대전 대덕구의 한솔제지 공장에 있는 것을 파악한 경찰은 공장 내부 폐쇄회로(CC)TV를 분석했다. 경찰은 불량품이나 폐종이를 펄프 제조기 탱크에 옮겨 넣는 작업을 하던 A씨가 전날 오후 3시30분쯤 개폐기 구멍에 빠져 기계 내부로 추락한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함께 근무하던 동료가 있었으나 사고 장면을 목격하진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조사에서 동료들은 당시 근무 교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A씨가 먼저 퇴근한 줄 알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이 제지공장의 생산팀 가공파트 정규직 노동자인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공장 관계자 등을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해 조사할 방침이다.
노동당국도 해당 사업장이 산업안전보건법 및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가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지난 4월11일 북미에서 개봉해 6027만달러(약 832억원)의 수익을 거두며 역대 한국영화 북미 흥행 1위 기록을 쓴 3D 애니메이션 <킹 오브 킹스>가 오늘(16일) 500개관, 1200개 스크린에서 국내 관객들과 만난다. 북미 개봉 당시 로튼 토마토 팝콘 지수 98%, 시네마스코어 ‘A+’ 등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 극찬을 받은 영화다. 성경 기반의 애니메이션 중 역대 최고 기록을 보유한 <이집트 왕자>(1998)의 오프닝 성적도 뛰어넘었다.
알려졌다시피 이 영화는 국내 VFX(Visual Effects·시각특수효과) 전문업체인 모팩스튜디오 대표 장성호 감독(55)이 제작·연출·각본을 맡아 100% 국내 자본으로 완성했다. 국내 VFX 1세대인 장 감독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와 <명량>, 드라마 <태왕사신기>, 미국 드라마 <스파르타쿠스> 등 수백편에 달하는 영화와 드라마의 시각효과를 맡았다.
<킹 오브 킹스>의 제작기간은 10년. 긴 세월만큼 파란(波瀾)도 적지 않았다. 깊은 좌절감과 빚더미에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고 장 감독은 말했다. 그래도 어둠 속에서도 길은 늘 열렸다.
지난 9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모팩스튜디오에서 장 감독을 만났다. 예수의 생애를 그린 <킹 오브 킹스>의 제작 뒷이야기와 그의 삶에 대해 묻고 들었다.
북미·남미 크리스마스 재개봉 결정
- <킹 오브 킹스>의 북미 흥행 돌풍이 국내에서도 이어질 것 같습니까.
“지난 4월 미국과 캐나다에서 개봉할 때는 심정이 담담했어요. 지난 10년간 치열하게 준비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것 자체에 안도했고, 흥행도 어느 정도 예측했기 때문이에요. 개봉 전 일반 시사와 극장 체인들을 상대로 한 배급 시사에서 반응이 굉장히 좋았거든요. 그래서 당초 목표였던 2800개관을 웃도는 3200개관에서 개봉할 수 있었고요. 그런데 지금은 긴장돼요. 한국은 반기독교 정서가 세서 예측을 못하겠어요.”
- 북미에서 거둔 수익은 얼마인가요.
“미국·캐나다에서 두 달 가까이 상영해 6027만달러의 수익을 거뒀어요. 브라질 등 남미와 그 외 지역에서 거둔 수익은 814만달러(약 112억원)고요. 그런데 미처 못 본 분들의 요청이 쇄도하면서 북미와 남미에서 크리스마스 재개봉이 결정됐어요. 같은 해에 두 번 개봉하는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고 해요.”
- 총 몇개국에서 상영합니까.
“이미 개봉한 46개국을 비롯해 연말까지 90개국 개봉이 확정됐어요. 협의 중인 곳까지 포함하면 약 120개국에서 상영을 예정하고 있죠. 유럽은 영국 등 영어권에서 먼저 개봉했고, 비영어권은 크리스마스 때 개봉합니다.”
<킹 오브 킹스>는 찰스 디킨스의 미완의 유작 <우리 주님의 생애(The Life of Our Lord)>에서 영감을 받았다. 장 감독은 디킨스가 막내아들에게 예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부자가 함께 시간여행을 떠나 예수의 생애를 직접 체험하는 액자형 구성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때 그 사람들> <더 킹> <암살> 등의 김우형 촬영감독이 공동제작과 촬영을, <1987> <명량> <노량> <한산> <파묘> 등의 김태성 음악감독이 음악을 맡았다. 오스카 아이삭, 피어스 브로스넌, 케네스 브래너, 우마 서먼 등 할리우드 톱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 한국어 더빙에는 이병헌, 이하늬, 양동근, 차인표 등이 나섰다.
- 처음부터 북미를 겨냥해 <킹 오브 킹스>를 기획했다죠.
“저는 영화계 일을 VFX로 시작했어요. 컴퓨터그래픽(CG)으로 시각적인 것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충분히 트레이닝돼 있어 자신 있었죠. 이 역량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하고 싶었어요. 할리우드 수준의 퀄리티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려면 비용이 많이 들어요. 국내 시장에서는 투자금 회수가 어렵다고 판단해 북미 시장을 타깃으로 한 거예요.”
- 왜 예수 이야기인가요.
“미국은 기독교 콘텐츠가 실패하지 않는 시장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에요. 사례를 조사해 보니 미국 시장에서 기독교 콘텐츠는 크게 흥행에 성공하진 않아도 OTT, IPTV, DVD를 비롯해 부가판권 시장이 굉장히 크고 생명력이 길어요. 극장 상영이 끝나도 교회에서 배급하는 네트워크가 따로 존재할 정도로 수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이야기라면 최소한 실패하지는 않겠구나, 투자자들이 돈을 잃게 하지는 않겠구나 확신했죠.”
- 제작비 360억원이 투입됐더군요.
“10년 전 기획 당시 저는 ‘2000만달러 이내 제작’ 기준을 세웠어요. 당시 환율로 256억원이었죠. 기독교 콘텐츠는 부가판권 수익이 극장 판권 수익의 5배 정도니까 최소한 원금 회수는 가능할 것으로 봤거든요. 그런데 제작기간이 계속 늘어나면서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어요.”
- 국내 자본으로만 제작비를 채운 이유는 뭔가요.
“기획안을 할리우드 친구들에게 보여줬더니, 잘될 것 같다면서 투자자들을 연결해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사양했어요. 할리우드에서 메이저 영화제작사 작품이 아닌, 독립영화들이 어떤 식으로 자본을 충당하고 제작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에요. 투자자들이 심각하게 창작을 침해하는 걸 당연시하고 저작권을 빼앗는 일도 다반사예요. 그래서 국내 자본으로만 만들기로 결심한 거예요. 그로 인해 고난이 시작됐지만요(웃음).”
-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군요.
“저희 회사가 콘텐츠펀드에 출자한 게 있어 초기 50억원은 투자받았지만 이후 자금을 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어요. 투자자들을 찾아다니며 설명하고 최소한 돈을 잃지는 않는다고 설득했지만 아무도 안 믿는 눈치였어요. 면전에서는 못하고 뒤에서 ‘저 영화가 되겠냐’ ‘하던 거(VFX)나 하지’ 등 쑥덕거림이 돌고돌아 제 귀에도 들렸죠. 그래도 긴 시간에 걸쳐 겨우겨우 제작비를 마련해 나갔어요.”
토머슨 “인생에 한 번 쓸 카드 쓰겠다”
- 16년간 디즈니의 캐스팅 디렉터로 일해온 제이미 토머슨이 영어 더빙을 할 스타들 섭외에 큰 도움을 줬다죠. 어떻게 그와 인연이 된 건가요.
“과거 할리우드에서 함께 작업했던 친구들에게 보이스 캐스팅 디렉터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바로 ‘제이미 토머슨이지’ 하며 연결해주더군요. 제이미는 디즈니에 캐스팅 부서를 창설한 사람이에요. 기획안과 시나리오 영어 번역본, 디자인 작업 결과물들을 먼저 보내고 찾아갔죠. 제이미는 ‘이 작품은 꼭 만들어야 한다’며 ‘인생에 한 번 쓸 카드를 이 작품에 쓰겠다’고 말했어요.”(앞서 모팩스튜디오는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만든 샘 레이미 제작 드라마 <스파르타쿠스>(2010)와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만든 배리 오스본이 제작한 액션영화 <워리어스 웨이>(2010)의 VFX를 담당했다.)
- 그는 뭐에 꽂혔다던가요.
“일단 예수님 이야기가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적이 없는데, 제가 처음 도전한 거예요. 뻔한 스토리인 데다 너무 무겁고 진중한 주제와 소재라는 생각에서죠. 게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끔찍한 결말이니, 아동용으로 쉽지 않겠다고 판단해 지레 포기한 겁니다. 반면 <킹 오브 킹스>는 찰스 디킨스와 막내아들 월터의 대화와 예수님의 생애가 2000년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져요. 예수님과 월터가 직접 교감하기도 하고요. 제이미는 그런 점이 어드벤처 판타지물처럼 몹시 흥미롭다더군요.”
- 한국어 대사를 미국인들의 귀에 쏙쏙 들어오는 영어 대사로 바꾸는 데도 공을 들였겠어요.
“저와 디즈니 소속 작가 롭 에드워드, 그리고 제이미가 2017년쯤 LA에서 2주간 매일 아침 8시에 만나 밤 10시까지 대사 윤색을 같이했어요. 제가 대사마다 어떤 의도로 쓴 거라고 설명하면, 롭이 대사를 입에 잘 붙게 윤색하고 제이미는 그걸 즉석에서 연기했죠(웃음).”
- 촬영방식도 새롭더군요.
“게임을 만드는 언리얼 엔진이란 도구가 있어요. 그걸 사용해 가상 환경 안에서 실사 영화처럼 배우들에게 모션 캡처가 가능한 옷을 입고 연기하게 했어요. 그 장면을 카메라로 촬영하고 편집한 후 이를 기반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거예요.”
먼저 선보인 북미에서 놀라운 성적표를 받기까지 10년의 시간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했고 절체절명의 시기들이 있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은 직격탄이 됐다. VFX 작업 의뢰로 연 200억원의 매출을 안겨주던 중국 시장이 한순간 닫혔기 때문이다.
- 재정적 타격이 컸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킹 오브 킹스> 완성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국내 한 콘텐츠 회사의 자회사로 회사가 편입했어요. 하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죠. 저는 제 지분을 포기하는 대신 이 영화에 대한 모든 권리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나와 3년 전 모팩스튜디오를 재설립했어요. 2년 전엔 스페인의 한 외주사에 사기를 당했어요. 디킨스와 월터가 등장하는 26분 분량의 애니메이션 하청을 맡겼는데, 계약 내용과 다른 돈을 요구하며 결과물을 주지 않았어요. 알고보니 작업은 진행도 안 했더군요. 결국 다른 곳에 일을 주고 추가 제작비를 마련하느라 빚이 85억원까지 늘었어요.”
-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습니까.
“솔직히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어요. 제가 기댈 건 기도밖에 없었죠. 그런데 번번이 알 수 없는 방향에서 방법이 찾아지거나 문제가 해결됐어요. 운이 좋다거나, 우연이라고 하기엔 기적 같은 일이 많았어요.”
그는 1970년 광주광역시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광주에서 학강초, 금난중, 서강고를 졸업하고 1990년 홍익대 미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해 1996년 졸업했다.
유소년기 장르·등급 불문, 개봉 영화 거의 섭렵
- 어린 시절 어떤 아이였습니까.
“영화광이었고, 고전문학을 즐겨 읽었어요. 만화책과 애니메이션도 좋아했고요. 성격은 내성적이었어요.”
- 어쩌다 영화광이 됐나요.
“청년 시절 국방부 촬영대(현 국방TV)에서 촬영감독으로 일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이에요. <배달의 기수>를 만드셨다고 해요. 건강이 나빠진 후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광주시내에서 규모가 제법 큰 갈빗집을 운영했어요. 그리고 자신의 영사기사 자격증을 지역 극장에 빌려줬죠. 덕분에 아버지 책상 위엔 항상 광주극장, 태평극장 등의 영화 초대권이 쌓여 있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저는 틈만 나면 그걸 들고 영화관으로 달려갔죠. 개봉 영화는 장르 불문, 등급 불문, 거의 다 봤어요. 영화감독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 미술은 언제 시작한 건가요.
“중학교 때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미술선생님이 당해 미술대회에 나갈 학생 중 한 명으로 차출하셨어요. 김우형 감독도 당시 급조한 미술부에서 만났어요. 대회가 끝나면 해체해야 하는데 우리가 간청해 미술부가 계속 유지됐어요.”
-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나봅니다.
“처음에는 아니었어요. 서강고 입학 성적이 전교 2등이었어요. 그래서 1학년 때부터 서울대반에서 특별반 수업을 해야 했어요. 아침 6시부터 2시간 따로 수업하고 원래 반으로 이동해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밤 10시까지 공부한 후 다시 서울대반에 모여 자정까지 학습했어요. 이걸 1년을 하다보니 미쳐버리겠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서울대에 들어가면 뭐 하나, 회의감이 밀려들었어요. 그즈음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 어떤 사건인가요.
“수업시간에 제가 몰래 책을 읽다가 들켰는데, 공교롭게도 그 책이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였어요. 억압된 사회와 몰이해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상처 입고 고뇌하는 젊은이의 이야기잖아요. 이 일로 심하게 체벌을 당하면서 저는 공부를 계속하는 게 의미 없다는 결심이 확 섰어요. 실제 우리 사회에서 일부 서울대 출신 엘리트들이 이기적 욕심으로 세상을 다 망가뜨리고 있잖아요. 저도 그런 사람으로 교육될 게 뻔해 보였거든요. 그래서 미대에 가겠다고 선언했죠. 좋아하는 일을 함으로써 해방감을 얻고 싶었어요.”
- 학교와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나요.
“발칵 뒤집어졌죠. 모범생의 삶을 살다가 처음 반항한 거거든요. 그때부터 제가 공부를 놔버렸어요. 그림을 그렸죠. 그런데 고2 때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집안이 풍비박살났어요.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식당도 불이 나 망했고요. 참 험난했어요. 대학생이던 큰누나와 형도 생활전선에 나서려 학업을 중단해야 했으니까요. 저는 집에 손 벌리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미술학원에 찾아가 청소와 정리를 도맡는 대신 학원비를 면제받았어요.”
- 90학번인데, 재수를 한 건가요.
“1989년 4년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전남대 미대에 입학했다가 한 달 만에 그만뒀어요. 어느 날 선배들이 단과대 옥상에 후배들을 집합시켜 엎드려뻗쳐를 시켰어요. 곧 팰 분위기였죠. 민주화의 성지 전남대에서, 그것도 예술혼을 불태워야 할 미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납득되지 않아 반항하고 그 길로 자퇴했어요. 그러곤 서울에 올라와 재수했죠.”
- 서울에선 어디서 지냈나요.
“서울 봉천동에 사시는 이모할머니를 찾아가 잠만 자게 해달라고 간청했어요. 밤에 들어가면 밥 한 끼는 차려주셨어요. 그 한 끼로 하루를 버티며 낮에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고 저녁엔 미술학원에 갔어요. 거기서도 학원비 대신 청소를 하겠다고 했어요. 원장선생님은 그림을 한 번 그려보라더니, 서울대나 홍대 미대 갈 실력이니 무료로 다니라고 했어요.”
- 왜 전공으로 시각디자인을 선택했습니까.
“영화 포스터계의 전설인 드루 스투루전을 존경했어요. <스타워즈> <인디아나 존스>의 포스터를 그린 분이에요. 저도 영화 포스터 디자인을 해볼까 생각했어요.”
홍대 미대 입학 후 미술학원 강사 등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지만 실력이 좋고 워낙 손이 빠르다 보니 일감이 몰렸다. 특히 학교로 주문이 들어오던 대기업 사보 일러스트를 도맡다시피하면서 주머니 사정도 좋았다. 방대한 독서량에 따른 문해력이 도움이 됐다. 종종 백화점 이벤트를 알리는 걸개그림도 그렸다.
영화일을 시작한 것도 대학생 때다. 3학년 때인 1994년 말 <귀천도>(1996)의 프리프로덕션에 참여하면서 영화영상 시각효과 작업의 기반을 닦고 영화 크레디트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회사를 설립한 것도 이때다. 이후 영화 <고스트 맘마> <공동경비구역 JSA> <해운대> <명량>, 드라마 <태왕사신기> <별에서 온 그대> 등 수백편의 영화·드라마 시각효과를 담당했다. 2002년 ‘제1회 한국 영화대상’ 시각효과상(<화산고>), 2009년 제30회 청룡영화제 기술상(<해운대>) 등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 꽤 이른 시기에 회사 사장이 됐네요.
“회사 대표가 <귀천도> <박봉곤 가출사건>을 비롯한 몇개 영화의 계약금 선금을 받고 줄행랑을 쳤어요. 이미 <귀천도> 등의 시각효과를 작업하던 터라 일을 마무리해야겠기에 제가 일러스트 등으로 버는 돈으로 장비 임차료를 내고 직원 월급도 주면서 프로젝트를 마무리했어요. 그때 회사를 만든 거예요. 법적 책임이 없는 제가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는 모습을 좋게 본 영화계 선배들이 이후 일감을 많이 주셨죠. 하지만 당시만 해도 영화작업으로는 돈벌이가 안 됐어요.”
- 그럼 어떻게 버텼습니까.
“당시 수익 창출원은 영화 예고편이었어요. 이전까지 예고편은 조감독이 편집기사·음악감독 등 메인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B컷을 편집해 만들었어요. 예고편이 조감독의 재능을 입증하는 수단이었거든요. 그런데 1990년대 들어 기획영화 시대가 되면서 프로듀서의 입김이 세지고, 마케팅 개념이 생겼어요. 어느 날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가 제게 <반칙왕>(2000) 예고편을 만들어보겠냐고 했어요. 완성해 극장에서 틀었더니 관객들이 세 번 빵 터졌어요. 한국영화 예고편에 관객이 반응한 게 처음이라더군요.”
- 입소문이 나 주문이 쇄도했겠군요.
“그랬어요. 짧으면 1분30초, 길면 3분짜리 예고편을 많을 때는 일주일에 두 편씩 완성했어요. 그렇게 수백편을 밤에 혼자 만들었죠. 편당 3000만원 정도를 받았으니 얼마나 수익률이 좋아요(웃음).”
- 앞으로 모팩스튜디오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져갈 계획인가요.
“VFX 전문성을 유지하면서 콘텐츠 창작회사로서의 정체성을 띨 거예요. 이미 기획해놓은 작품이 여러 편이고 라인업도 짜놨어요. 당분간은 애니메이션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다음 작품이 뭔지는 아직 공개할 수 없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작품이에요.”
요즘 부쩍 언론과 교육계를 중심으로 고교학점제를 둘러싼 비난 여론이 거세다. 상대평가 5등급 체계와의 충돌, 자퇴율 증가, 기본 과목 미개설, 지역 간 격차, 교사 및 인프라 부족 등 운영상 문제점이 집중 조명되고 있다. 언론에서는 ‘교사 패닉’ ‘고교학점제 부작용’이라는 부정적 키워드가 연일 등장한다. 교육 현장 안팎에서는 제도의 전면 재검토는 물론 폐지론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고교학점제 문제점이 불거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고교학점제가 시범 운영되던 2018년부터 이미 꾸준히 지적돼 온 내용이다. 그런데 왜 지금 다시 고교학점제가 논란이 될까. 이는 정권 교체기와 맞물려 교육 당국으로 하여금 교육 정책에 다시 변화를 주도록 하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올해부터 전면 시행된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일정 학점(192학점)을 이수하면 졸업하는 방식의 교육제도다. 대학처럼 개인 맞춤형 시간표를 구성하고, 자기주도 학습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획일적 교육에서 탈피하는 상징적인 제도’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 제도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선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고교 유형의 단순화, 성취평가 중심의 내신 체계 확립, 지역 격차 해소, 교사와 인프라 확충 등이다.
그러나 이 전제 조건들은 정권이 바뀌면서 잘 갖춰지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로 바뀌면서 고교학점제는 철학과 현실 사이에서 어정쩡한 제도가 됐다. 고교학점제 원안은 지금과 달랐다. 문재인 정부는 고교학점제를 준비하며 외고·국제고·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고 내신을 절대평가(성취평가)로 바꿔 고교 간 유불리 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외고·국제고·자사고 존치 방침이 유지됐다. 고교 유형이 다양한데 절대평가를 적용하면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윤석열 정부는 고교학점제라도 내신 평가에서 절대평가와 함께 상대평가(석차등급제)를 혼용하는 방침으로 회귀했다.
대선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미래교육자치위원회가 내놓은 2028학년도 대입제도 수정 제안이 고교학점제 논란을 다시 지폈다. 여기에는 내신 성취평가 중심 회귀, 수능 절대평가 전환, 특목고의 일반고 전환 재추진 등이 포함됐다. 사실상 문재인 정부 시절 원안으로 돌아가자는 취지다. 민주당은 ‘이제 바로잡을 기회’라고 생각하겠지만, 현실 교육 현장에서는 또 다른 혼란을 부를 가능성이 크다. 이미 학생들은 기존 2028 대입 개편안에 따라 고교를 선택했고 현재 고교학점제에 맞춰 공부하고 있어서다.
문제는 고교학점제가 아니라, 자주 바뀌는 대입 제도와 그에 따른 불확실성이다. 성취평가 전환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 입시, 내신, 수능이 제각각 움직인다면 학생과 학부모는 결국 정답을 찾기 위해 학원으로 향한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교육 정책이 바뀔수록 불확실성은 커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물론 현행 고교학점제가 직면한 과제는 산더미다. 교원 확충부터 교원 업무 경감, 공간 확보, 지역 격차 해소 등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전면 철회도, 급진적 개편도 답은 아니다. 고교학점제를 제대로 하려면 학교 간의 다양성이 아니라 학교 안의 다양성을 보장하도록 해야 한다. 실현 가능한 과제부터 차근차근 개선해 나가는 실용적 접근이 필요하다. 오히려 지금은 공동교육과정 운영, 지역 간 온라인 연계 수업 등 이미 시행 중인 보완책들을 정교하게 다듬고 확산하는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 당국 정책의 일관성과 교육 주체 간 신뢰 회복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와 같은 중장기 전략도 힘써야겠지만, 지금 시행되는 고교학점제를 안정시키는 일이 현재 교육 현장에서는 더 급하다. 고교학점제가 시작된 이유와 초심을 돌아보고 교육 정책을 학생 중심으로 펴나가기를 기대한다. 교육은 정책이 아닌 한 사람과 한 국가의 미래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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